영화 승부 리뷰: 평점 4.6/5 <추추추천>
뭔가 오랜만에 한국 영화 리뷰 같기도 한데...
이번에는 연기파 배우 이병헌과 유아인의 작품이다.
******장르: 로맨스 / 판타지******
바둑을 주제로 한 승부!
바둑을 잘 모르는 나조차도 승부는 정말 몰입해서 봤다.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 이름만 들어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는 인물들.
이 영화는 단순한 바둑 대결이 아닌, 스승과 제자 사이의 애증, 존경, 질투, 그리고 성장에 대한 이야기다.
무엇보다 이병헌과 유아인의 연기가 몰입감을 끌어올려줬고,
바둑을 모르는 사람도 충분히 이해하고 즐길 수 있게 연출된 점이 인상 깊었다.
줄거리 (스포 있음)
이야기는 1980년대 후반, 바둑계의 전설이라 불리던 ‘국수’ 조훈현(이병헌)의 전성기 시절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세계 대회에서 일본과 중국 기사들을 모조리 꺾으며 한국 바둑의 자존심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언론도, 바둑팬도 모두 그를 향해 찬사를 보냈고, 그의 주도 하에 한국 바둑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런 조훈현의 앞에 어린 소년 이창호(김강훈, 이후 유아인)가 등장한다.
지방에서 바둑 천재로 주목을 막 받기 시작하던 어린 이창호에게,
조훈현은 그의 눈빛에서 천재적인 감각을 느끼고 직접 집에 들여 제자로 삼는다.
이후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바둑계의 판도 변화와 그들의 내면을 따라간다.
이창호는 말이 없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묵묵히 기보를 연구하며 성장한다.
조훈현의 집에서 생활하며 바둑에만 몰두하는 삶을 살아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조훈현을 위협할 실력을 갖추게 된다.
화려하고 공격적인 기풍의 조훈현과는 다르게,
수비적이고 빈틈없는 탄탄한 자신만의 기풍을 찾아낸 이창호의 실력은 결국 스승과 제자의 대결 구도를 만들게 되었고,
‘기계처럼 두는 바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실수 없이, 오차 없이 완벽한 수를 두는 이창호는
결국 스승 조훈현과의 공식 대국에서 맞붙게 된다.
이 영화의 중심 축은 바로 여기, ‘스승과 제자의 대결’이다. 바둑판 위에서 두 사람은 말을 아끼지만, 수로써 마음을 이야기한다. 조훈현은 제자에게 지면서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흔들리고, 이창호는 스승을 넘어서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찾아간다.
이병헌은 이 영화의 핵심이다. 승승장구하던 전성기의 여유로운 모습부터,
제자에게 지고 나서 괴로움과 혼란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습까지, 감정의 폭이 넓은 캐릭터를 절묘하게 소화해냈다.
바둑을 두면서도 눈빛 하나로 감정을 표현하는 이병헌 특유의 연기가 정말 돋보였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이창호에게 첫 패배를 안긴 이후 집 안에서 술에 취해 흐느끼는 장면.
그동안 권위와 자존심으로 버텨왔던 그의 ‘국수’라는 껍데기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그 찌질함조차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유아인 역시 절제된 감정 연기의 정점을 보여줬다.
말은 거의 없지만, 눈빛과 손놀림, 그리고 바둑판 앞에서의 호흡만으로도 인물의 성장을 보여준다.
실제 이창호 9단의 이미지와도 상당히 유사하게 그려져 있어 몰입감이 높았다.
승부가 인상적인 이유는 단순히 실화 기반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바둑을 모르는 관객도 이해할 수 있도록, 중요한 장면마다 해설적 연출과 음악,
배우들의 감정선을 통해 충분한 설명 없이도 스토리를 따라갈 수 있게 했다.
기보 해설 없이도, 어느 수가 좋은 수였는지, 어느 수에서 실수가 나왔는지를 인물의 표정, 주변 반응,
카메라 워크로 잘 전달한다. 마치 스포츠 영화처럼 짜릿한 순간들이 있으며, 그 안에 감정의 흐름이 녹아 있다.
승부는 기본적으로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의 실제 사제 관계를 바탕으로 구성됐지만,
극적인 연출을 위해 몇몇 설정은 각색되었다고 한다.
- 실제와는 다른 대국 순서와 시점
영화에서는 이창호가 조훈현과의 첫 대국에서 승리한 이후 바로 본격적인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이창호가 스승을 이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에도 다양한 승부와 사건이 있었다. - 인물 간의 갈등 묘사
실제 두 사람의 관계는 영화만큼 극적인 감정 대립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는 스승이 제자를 질투하고, 제자가 스승을 넘어서며 갈등이 격화되는 구조지만, 실제로는 조훈현이 이창호를 진심으로 아끼고 지지했던 시기들도 많았다. 물론 바둑판 위에서는긴장감이 있었겠지만, 영화는 그 부분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부각한 셈이다. - 사생활 연출
조훈현이 술을 마시고 괴로워하거나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장면은 사실보다 극화된 연출이다.
극적인 몰입을 위해 도입된 장면들로 보이나, 이병헌이 그 역할을 잘 살려냈기 때문에 영화적 감흥을 해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단순한 승부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승부와 애정 간의 미묘한 감정이었던거 같다.
조훈현은 이창호를 바라보며 ‘언젠가 나보다 더 큰 바둑을 둘 아이’라고 예감했고, 실제로도 그 예감은 현실이 된다.
그러나 막상 그 아이가 자신을 넘어서게 되자, 그는 흔들리고 괴로워진다.
이 감정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혹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복잡한 감정이다.
그런 감정을 이병헌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유아인은 너무나 절제된 방식으로 보여줬다.
덕분에 마지막 바둑판 앞 장면은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바둑을 전혀 모르는 나조차도 이토록 빠져들 수 있었다는 건, 이 영화가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를 증명하는 부분일 것이다. 한국 영화계에 오랜만에 등장한 ‘진짜 이야기’다운 작품. 개인적으로는 올해 본 영화 중 손에 꼽고 싶다.